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임스 밴 플리트 (문단 편집) == 기타 == * 여러 모로 오점이 있다 여겨지는 [[더글러스 맥아더]]와 달리 [[4.19 혁명]] 폄하와 [[5.16 군사정변]]에 대한 맹목적 옹호, [[직각식사]] 도입 정도를 제외하면 오점이 거의 없는 편이다. 사실 4.19 혁명의 경우에는 본인이 이승만과 친하고 전후 사정을 자세히 모르다 보니 4.19 혁명이 보기에는 이승만이 억울하게 쫓겨났다고 보일 수도 있었다. 이승만 본인도 아닌 밑의 [[이기붕]]의 부정선거로 인해 이승만도 같이 쫓겨났다고 보일 수도 있는데[* 이승만은 야당 후보였던 [[조병옥]]이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심장 이상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단독 후보가 됨에 따라 자동으로 당선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승만도 부정 선거에 상당수 관여했다는 증언이 많기 때문에[* 소수 증언이긴 하지만 이승만이 워낙 고령이라 부정선거 기획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승만이 주도적으로 기획하지 않았더라도 그걸 방관한 것도 사실이다.][* 지난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장면이 당선되면서 불쾌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게 싫었던 이승만과 고령이던 이승만의 뒤를 이어 권력을 물려받음과 동시에 지난 선거에서 떨어지면서 이번 선거마저 지는 순간 본인의 정치적 입지나 신뢰도가 바닥으로 떨어질 걸 우려한 이기붕 개인의 욕심이 합쳐지며 그 어느 때보다도 치밀하게 부정선거가 기획될 것 같았지만... 실상은 역대급으로 허술한 부정선거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승만이 억울하게 쫓겨난 건 절대 아니며, 설령 부정선거와 이승만이 무관했다 한들 이미 3선 독재자에 저지른 실책이 상당했으므로 이승만이 쫓겨나는 것 자체는 기정사실화였다. 하여간 이승만과는 개인적 친분이 상당했다고 치지만 박정희와는 어디서 친분이 생겼는지 군사 쿠데타까지 적극적으로 옹호한 것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 명망 높은 전쟁 영웅이지만 육군사관학교 시절 성적은 164명 중 92등으로 중간보다 조금 낮았다고 한다. 동기생인 아이젠하워는 61등.[* 사실 당시에 성적 상위권이었던 생도들은 대부분 [[공병]] 병과를 선택했기 때문에 전쟁영웅이 될 기회가 없었다. 실제로 당시 졸업 성적 상위 20명 중 [[중장]]으로 진급한 사람은 공병을 선택하지 않았던 헨리 오랜드(Henry Aurand) 한명 뿐이며 그 역시 주로 후방에서 근무했다. 참고로 오랜드 중장은 해안포 병과(coast artillery corps)로 임관했다가 병기 병과(ordnance department)로 전군한 인물이다. 참고로 별들의 기수 이전 웨스트포인트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던 상급부대장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도 군 경력 시작은 공병 병과였다.] || [[파일:syngman rhee and van fleet are fishing.jpg|width=100%]] || || 1953년, [[정전 협정(6.25 전쟁)|휴전]]을 앞두고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대통령]]과 제임스 밴 플리트 [[주한미군사령관|미8군 사령관]]이 낚시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 퇴역 후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했으며, 많은 지혜와 경험을 가진 대통령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승만 입장에서도 미군 수뇌부 중 북진을 주장하고 한국군 증강에도 매우 호의적이었던 밴 플리트는 매우 든든한 후원자였으니 둘의 사이가 꽤 좋았다.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국군의 증강을 호소하는 이승만을 보면서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고 훗날 회고했다. * 한국에 대한 애정도 많아서 퇴역 이후 그의 농장을 찾아 오는 한국인이 있으면 태극기를 게양하면서 반갑게 맞이해주었다고 한다. 본인도 한국이 제 2의 조국이라고 밝혔고 집무실의 이름도 한국의 방으로 했고 그곳에는 본인이 내한할 때 찍은 사진, 한국 골동품 등이 가득했다. * [[반공포로 석방 사건]] 당시에는 이미 퇴역했기에 한국에 없었지만 반공포로 석방에 찬성했으며, 당연히 해야할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 한국에 있을 때 한식을 즐겼는데 퇴역하고 나서도 쌀밥이 있는 한국식 식단을 즐겨 먹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미국산 쌀밥이 한국에서 먹었던 쌀밥과는 맛이 좀 달라서 한식의 맛을 제대로 못 내는 것 같다며 다소 아쉬워했다. * 1952년 12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밴 플리트는 고착화된 전선을 북상시킬 목적으로[* 당시 미국 정부는 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하여 북한 지역으로의 진격을 제한하고 있었다.] 아이젠하워에게 미군의 증강 없이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으며, 이에 따른 세부적인 작전 계획도 발표했다. 당시에 대화 분위기가 좋아 본인도 곧 북진이 승인될 것으로 믿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본인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안타깝다고 회고했다. 계획이 승인되지 않은 이유로 밴 플리트는 당시 합참의장이었던 오마 브래들리가 반대 의견을 피력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 [[압록강]]으로 재진격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 많았는지 퇴역한지 30년이 지난 후에도 "당시 연합군은 충분히 [[북진통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는데 워싱턴 정부가 압록강 진격을 허락하지 않아 북한이 존속하여 지금까지 불리한 결과를 낳았고 이는 크나큰 실책이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 중공군이 참전했을 때 만주에 전술 핵무기를 쓰자는 맥아더의 계획에 처음에는 찬성했다고 밝혔다. 적정한 장소에 핵무기를 투입하면 조기에 전쟁을 끝내 수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 트루먼 대통령이 해당 계획을 승인하지 않아 핵무기는 결국 투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 소련이 맞대응으로 핵무기를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었고 '''[[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이 있었기에 나중에는 생각이 바뀌었으며 트루먼 대통령의 결정도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밝혔다. * 여러모로 맥아더와 비교도 되는 인물인데 실제로 그는 전투에 있어 맥아더처럼 공격적인 성향에 가까웠다. 본인도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적이 공격해올 때 방어하는 그런 성향이 아니라고 훗날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가 압록강까지 재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방어적인 성향을 취했던 리지웨지와의 성향과는 확실히 대비된다.] 이러한 공격적인 성향 때문에 나중에 맥아더처럼 정치하려고 저러느냐는 주변의 시선도 받았다고 한다. 다만 맥아더와는 달리 밴 플리트는 상부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일단 군인인 이상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워싱턴과 불협화음을 불러 일으켰던 맥아더와는 달리 상부와 크게 마찰을 빚는 일은 없었다. 본인도 [[문민통제|군인들은 선출된 민간 지도자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여러번 밝힌 적이 있다. * 부정적으로는 현재 한국 군대에서 구시대적 악습이라는 비판을 받는 [[직각식사]]를 한국에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밴 플리트 장군의 주도로 1952년 진해에 4년제 정식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는데 당시 미국 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의 제복부터 시작해서 거의 모든 사관학교 문화를 일단 그대로 이식했다. 이 와중에 직각식사까지 [[복사 붙여넣기]]로 도입한 것. 물론 고체 위주의 미국 식사와 달리 밥과 국물로 이루어진 한국 음식의 특징 덕분에 국물이 흐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출처: 천금성, '황강에서 북악까지'.] *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인 존 아이젠하워 소령은 미군 제3 보병사단 예하 대대장으로 중부전선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다가,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포로가 될 위험 때문에 사단 정보참모로 보직 이동되었다.[* 초기에 자신의 아들을 후방으로 옮겨 달라는 제의에 얼마 전 외아들이 전사한 밴 플리트는 탐탁치 않아 했으나 아이젠하워가 "내 아들이 전사한다면 슬픈 일이 되겠지만 난 그것을 가문의 영예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아들이 포로가 된다면 적군은 분명히 미국 대통령의 아들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국민들이 대통령의 아들을 구하라며 정부에 적군의 요구를 들어주라는 압력을 가하는 사태를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밴 플리트가 수긍하며 즉시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제8군 사령관을 지내다 사고로 사망한 [[월튼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는 제24 보병사단 중대장으로 부자가 모두 [[6.25 전쟁]] 일선에 참전했다. 그 외에 [[조지 S. 패튼]] 장군의 아들 조지 S. 패튼 4세도 1953년에 제40 보병사단 소속 전차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이처럼 [[6.25 전쟁]]에는 수많은 미군 장성의 아들들이 죄다 최전선에서 장교로 복무했다. (반면에 당시 한국군 장성들은 너무 젊어 미군 장성들의 아들 뻘이었다.) * '''[[6.25 전쟁]]에서 활약한 여러 미군 장성들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전공을 세웠고, 전후에도 한국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는 등 한국 입장에서는 분명 은인으로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그에 대한 인지도는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등에 가려진 편이다. 그나마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쟁 당시 한국군의 장교 양성, 교육훈련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그의 동상을 제작, 지금도 화랑대 교정 한 켠에 서 있다. * 그에 대한 국내 저작으로는 [[뉴라이트]] 계열에서 내놓은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제16권으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남정옥 박사가 쓴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2015년 발간)가 있다. * 젊은 시절부터 미식축구를 대단히 좋아했다. [[웨스트포인트]] 시절 육군 대표팀 선수로 활동했으며 각 지역의 대학교 학군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한번도 빠짐없이 미식축구 코치로 활동했다고. * 앞서 말한 '[[별들의 기수]]' 중 장성 진급자 중에선 [[마지막 생존자]]이다. 별들의 기수 전체의 마지막 생존자는 에드먼드 엘리스(Edmund De Treville Ellis)로 최종 계급이 대령이었으며 밴플리트가 사망한 뒤 3년 뒤인 1995년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